파괴자 크누트 3세는 매독과 정신착란에 이어 최근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바로 자신의 후계자 문제때문이다.
첩에게서 얻은 장남과 정실부인에게서 얻은 차남때문이다.
과거 크누트 3세는 자신이 포로로 잡은 어린 기독교 소녀에게 한 눈에 사로잡혔다.
차라리 첩으로 들이라는 봉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과 17살 차이가 나는 어린 소녀를 직접 교육하며 혼인을 맺었다.
하지만 결혼 후 후계자 소식이 없자, 봉신들 사기에서는 무시무시한 크누트가 사실은 사내구실 못하는 고자가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
여황제의 입지가 날이 갈 수록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이 혼인을 강행한 크누트3세의 체면은 떨어져갔다.
불화를 잠재우기 위해 크누트 3세는 권역 내 유력 가문 출신의 여인을 자신의 첩으로 들이게 되었다.
첩과의 동침 이후, 궁정의사로 부터 첩의 임신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3개월 뒤, 부인 또한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이 연이어 전해졌다.
크누트 3세, 그의 나이 37에 자신의 첫 아이를 갖게 되었다.
이 소식에 일부는 황제와 제국의 앞날은 축복했으며, 한편으로 다른이들은 씁슬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리투아니아를 다스리고 있는 크누트3세의 조카가 그러했다.
몇 개월 뒤, 한 겨울에 크누트 3세의 첫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자신처럼 위대한 황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는 자신의 장남에게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3개월 뒤 부인도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그는 오딘의 축복이 아이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이의 이름을 시구르드라 지었다.
시간은 천둥처럼 빠르게 흘러, 두 아들들은 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제국 내에서는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60을 바라보는 쿠느트3세의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봉신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크누트3세의 아비저 크누트 2세가 확립한 제국 상속법에 따르면, 장자가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하지만 크투트 3세가 직접 고른 자신의 정실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에게 무게를 두는 시각이 존재했다. 크누트 3세와 그의 직계 조상들 모두 첩이 아닌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기 때문이다.
장남과 차남의 3개월이라는 짧은 나이 차이, 무엇보다 황위에 대한 정통성 때문에 제국의 후계에 대해 봉신들은 저마다 엇갈린 주장을 하고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크누트 3세의 조카이자 리투아니아의 왕이었다.
그는 그의 사촌동생들이 태어나기 전, 황위 계승 1순위였다.
하지만 사촌동생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사촌들이 성인이 된 지금, 과거 그가 가졌던 황위에 대한 아쉬움은 사라졌다.
그동안 그가 통치하는 제국 최전방 리투아니아 개척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희미한 아쉬움에 다시 불씨를 붙이고자 하는 봉신들이 존재했다.
크누트 3세의 자식들 대신 그를 황위에 올림으로써 이득을 취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차남 시구르드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앞으로 짧은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바이킹 전사 3천 명을 이끌고 떠났다.
편지에는 황제와 정실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3개월 늦게 태어난 형제가 모든 것을 갖는 것에 대한 불만과 원망, 아버지에 대한 비난만이 적혀있었다.
그는 누군가 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자 모험을 떠났다.
제국의 황자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에 뛰어든 아들의 모습을 보며 충격에 빠졌다.
동시에 크누트 3세는 아들의 결단력, 용기, 야망에 아들보다 못난 아버지라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뒤, 크누트 3세는 자신의 조상과 아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특히 자신이 존경하는 할아버지 크누트 1세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
그의 할아버지는 바랑기안에 복무하고 돌아와 제국을 건국했다.
당시 덴마크와 노르웨이로 분열된 왕국을 다시 하나로 만들었다.
또한 카톨릭의 조직화된 십자군에 맞서기 위해 우리의 종교를 개혁하고 최고 종교지도자가 되었다.
크누트 1세가 있었기에 모든게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형제마저 살해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동생을 암살한 비정한 남자였고, 세상사람들로 부터 손가락질 받았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불멸이 되었고, 역사가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크누트 3세에게 비장한 결단을 내린 자신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들처럼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다.
장남은 차남 시그루드가 떠난 뒤, 차남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다.
평소 분노 이외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는 남자였기에 그 차이는 깊숙히 다가왔다.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은 첩의자식이라는 자신의 열등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크누트의 감정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크누트에게 전해졌다.
아버지로부터의 결투장이었다.
수 많은 사람들과 신 앞에 선 두 남자가 나타났다.
곧이어 60을 바라보는 노인과 이제 막 성인이 된 사내가 결투를 시작했다.
승리는 노인의 몫이었다.
노인은 팔이 잘려 비명을 지르고 자비를 구걸하는 젊은이 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손으로 젊은이의 마지막 숨을 끊어버렸다.
"늙은 크누트가 젊은 크누트를 죽였다"
결투의 결과는 제국 전역에 바람보다 빠르게 퍼져나갔다.
또한 강과 바다 그리고 산을 넘어서, "북쪽의 해적놈들이 부모자식 사이에 칼부림을 한다"는 소식이 듣는이로 하여금 치를 떨게 만들었다.
한편, 시구르드는 3천의 바이킹 전사들과 함께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바이에른 지역에서 기반을 마련했다.
세력을 키워 2만여 명의 전사들과 함께 보헤미아왕국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던 중, "늙은 크누트가 젊은 크누트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시구르드는 항상 결투에서 형제의 목숨을 끊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물려받을 형제와는 다르게 자신의 손으로 형제를 꺽고 황위를 되찾을 날만을 준비하던 시구르드는 피가 거꾸로 솓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누트 3세는 자신의 부인으로 부터 낯선 인장의 편지 한 통을 건네받았다.
편지의 발신인은 자신의 아들 시구르드였다.
편지의 내용은 부모자식 간에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들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시구르드는 보헤미아를 평정한 뒤, 제국으로 쳐들어가 크누트 3세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적혀있었다.
이 편지를 본 크누트 3세는 미친듯이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몇 년 뒤, 크누트 3세는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말년에 결혼 이후 생긴 매독으로 고통받았다.
그의 치료를 담당한 궁정의사에 따르면, 매독으로 한 쪽 다리를 자르게 되자 젊은 크누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미친듯이 웃으며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크누트 3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시구르드는 자신이 통치하던 오스트리아에서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했다.
크누트 3세의 유언, 제국 상속법에 따라 제국의 주인은 시구르드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정복자로서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
특히 자신이 존경하는 할아버지 크누트 1세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
그의 할아버지는 바랑기안에 복무하고 돌아와 제국을 건국했다.
당시 덴마크와 노르웨이로 분열된 왕국을 다시 하나로 만들었다.
또한 카톨릭의 조직화된 십자군에 맞서기 위해 우리의 종교를 개혁하고 최고 종교지도자가 되었다.
크누트 1세가 있었기에 모든게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형제마저 살해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동생을 암살한 비정한 남자였고, 세상사람들로 부터 손가락질 받았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불멸이 되었고, 역사가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크누트 3세에게 비장한 결단을 내린 자신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들처럼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다.
장남은 차남 시그루드가 떠난 뒤, 차남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다.
평소 분노 이외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는 남자였기에 그 차이는 깊숙히 다가왔다.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은 첩의자식이라는 자신의 열등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크누트의 감정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크누트에게 전해졌다.
아버지로부터의 결투장이었다.
수 많은 사람들과 신 앞에 선 두 남자가 나타났다.
곧이어 60을 바라보는 노인과 이제 막 성인이 된 사내가 결투를 시작했다.
승리는 노인의 몫이었다.
노인은 팔이 잘려 비명을 지르고 자비를 구걸하는 젊은이 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손으로 젊은이의 마지막 숨을 끊어버렸다.
"늙은 크누트가 젊은 크누트를 죽였다"
결투의 결과는 제국 전역에 바람보다 빠르게 퍼져나갔다.
또한 강과 바다 그리고 산을 넘어서, "북쪽의 해적놈들이 부모자식 사이에 칼부림을 한다"는 소식이 듣는이로 하여금 치를 떨게 만들었다.
한편, 시구르드는 3천의 바이킹 전사들과 함께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바이에른 지역에서 기반을 마련했다.
세력을 키워 2만여 명의 전사들과 함께 보헤미아왕국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던 중, "늙은 크누트가 젊은 크누트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시구르드는 항상 결투에서 형제의 목숨을 끊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물려받을 형제와는 다르게 자신의 손으로 형제를 꺽고 황위를 되찾을 날만을 준비하던 시구르드는 피가 거꾸로 솓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누트 3세는 자신의 부인으로 부터 낯선 인장의 편지 한 통을 건네받았다.
편지의 발신인은 자신의 아들 시구르드였다.
편지의 내용은 부모자식 간에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들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시구르드는 보헤미아를 평정한 뒤, 제국으로 쳐들어가 크누트 3세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적혀있었다.
이 편지를 본 크누트 3세는 미친듯이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몇 년 뒤, 크누트 3세는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말년에 결혼 이후 생긴 매독으로 고통받았다.
그의 치료를 담당한 궁정의사에 따르면, 매독으로 한 쪽 다리를 자르게 되자 젊은 크누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미친듯이 웃으며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크누트 3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시구르드는 자신이 통치하던 오스트리아에서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했다.
크누트 3세의 유언, 제국 상속법에 따라 제국의 주인은 시구르드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정복자로서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